미당(未堂)은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다 는 뜻입니다.
미당 서정주의 시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미당 서정주는 호에서 알 수 있듯이 아직 어른이 되자 않았다라는
뜻에서 알 수 있듯이 평생을 천진난만하게 순수한 세계에서 살다 가셨다.
비록 그 천진함덕분에 정치적인 글에 대한 비판과 말실수같은 것들이 있었지만 그의 부끄러울 수 있고
오점이 되었던그런 행동도 그의 시세계로 인해 그의 시는 면죄부를주었고 전설로 살다 가셨다.
만약 노벨문학상을 우리말로심사를 했었다면 그리고 그의 시세계를 적확하게 번역할 수 있었다면
그는 노벨문학상을 몇번은 탈 수 있었을 것이다.
2000년 12월 24일에 하늘나라로 가셨는데 크리스마스이브에 돌아가신 것도 이채롭다.
이번에 집수리 때문에 잠깐 이사를 했는데 우연히 책정리를 하다가 서정주님의 시집 몇권을 찾을 수 있었다.
만약 그분이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린 오늘 같은 날에 어떤 시를 쓰셨을까.
아이같이 천진하셨던 미당 서정주님의 모습과 그분의 시가 오늘 밤 문득 그리워진다.
서정주를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도 몰라 그분에 대한 소개글이 있어 퍼와 올려본다.
첫시집 <화사(1938)> 에서부터 마지막 15번째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1997)> 에 이르기까지 정열적으로 새로운 시세계를 일궈내 해외에 대표 한국시인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시의 학교', '시인 중의 시인', '큰 시인들 다 합쳐도 미당 하나만 못하다', '시의 정부 (政府) ' , '한국이라는 부족 언어의 주술사' ,'시선(詩仙)'으로 불릴 정도로 한국시의 최고 경지를 일궜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는 동국대 및 서라벌예대 교수로 재직하며 배출한 제자 문인들이 현재 문단의 중추를 이루는 등 많은 시인과 문인제자를 양성 한 몫도 크다 하겠다. 등단 이후 60여년간 미발표작 포함 1천편에 가까운 시를 다산(多産)하였는데 이는 국내에 유례가 없고, 외국에서도 독일의 괴테나 헤르만 헤세 정도가 비견될 정도 임. 한국전쟁 후 반공 국시가 더욱 강화되면서 그의 시적 경향이 남한 문학사의 주류로 자리잡았고, 이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무려 10편 가량의 시가 실리는등 다수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됨으로써 국민의 보편적 정서에도 상당히 깊숙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국 문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소설의 김동리와 비견되는 시문학의 교주(敎主)로 ‘미당 사단’이라는 거대 계보가 형성됐으며 이는 교수시절 기른 이원섭, 이제하, 황동규, 고은, 김초혜 등 수많은 제자와 신춘문예등 심사위원으로 등단시킨 문인등이 학계 언론계 및 주류 문단의 중진으로 포진하고 각종 문인협회조직에의 참여와 정권의 비호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룬 결과였다. 일제 말기 징병을 종용하는 글과 친일시를 발표하는등의 친일행적으로 반민족 매국친일파로, 해방 직후 친일파를 대거 중용, 정치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 80년 신군부 등장 이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축하 축시헌사, 광주항쟁과 전두환정권 수립 와중에 TV방송에 출연해 행한 전두환 (全斗煥) 군사파쇼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등의 정치 참여로 일제 및 독재권력 주변을 맴돌며 훼절한 문인이라는 불명예와 “아부와 굴종”이라는 지탄 및 반민중 반민주 친독재 야합인물로 불리는 오점을 남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일본이 망해도 한 백년은 갈 줄 알았다.....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공인함. 국내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후배들의 따가운 비판 대상이 됐고, 과거의 시 세계도 빛이 바램. 문학교육 현장에서도 부정적 인식이 확산돼 국정교과서에서 그의 시가 잇따라 배제됐으며 검인정 교과서도 일부만이 제한적으로 수록됐다. 이 때문에 자신이 추천한 시인 고은씨 등이 차례로 등을 돌린데 대해 서운함을 털어놓기도 했으며 그의 와병을 계기로 일부 계간지와 언론이 미당의 부끄러운 과거와 문학과의 상관 관계에 대한 논의를 벌이는 등 그의 평가와 관련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의 데뷔 초창기 청년의 순수함과 고뇌가 엿보이는 시 <자화상>은 평생에 걸친 시인의 기본적 성향과 태도, 그리고 제약된 운명을 암시해주고 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절명시 변해 버린 시대의 처열한 평가 앞에 서서 그저 긴 회한을 간직한 채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 나름의 굳은 신조와 믿음을 중얼거리며 사라져 가는 70대 후반 고집스런 노옹의 자화상이자 변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시도 한편 올려본다.
추일미음 | |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
사람들이 시를 읽지 않는다. 사람들이 시를 좀 많이 읽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시작을 서정주님으로 한번 해보셨으면 좋겠다.
요즘 고은선생님이 매번 노벨상후보에 오르시고 계시지만 미당 서정주님은 돌아가셨지만
우리나라의 국보같은 시인이셨다.
아마 몇백년이 지나면 더 위대하게 평가받으실 것 같다.
자화상(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할아버지의 숱 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 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詩)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 이 작품은 작자(作者)가 23세(歲) 되던 1937년 중추(中秋)에 지은 것이다.
<화사집, 남만서고, 1941>
이시는 말년의 그분에게 따갑고도 너무도 고통스런 아픔을 주었을 것 같다.
정말 죄는 미워해도 그분의 시는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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